유명한 경제학자 두 명을 뽑는다고 하면 가장 많이 나올 대답은 아마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일 것이다(물론 그 다음으로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 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거론될 수 있다).
전자는 오늘날 자유시장제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후자는 공산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반면에 부르주아 논평가들은 일반적으로 스미스를 극찬하고 마르크스를 경멸한다.
그러기에, 이 사회과학의 거장들 사이에는 이념적 장벽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정치경제학'이라는 동일한 이론적 계보에 속해 있다.
아무리 자유시장제를 열혈히 지지하는 자라 해도 이 사상가들 사이에 공통된 조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리버럴 매체인 『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스미스의 사상은 “수십 년 동안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스미스가 없었다면 마르크스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해당 학술지의 저자들은 비판적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자본주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이름이 정말로 마르크스주의 혁명 사상의 길을 닦았다는 말인가?
이번 달은 애덤 스미스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국부론』이 1776년 3월 9일에 처음 출판된 지 250주년이 되는 달이다 .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는 거품, 부채, 전쟁 등이 세계 경제를 파괴함에 따라 해결 불가능한 위기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질문들을 검토하고, 애덤 스미스부터 『자본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원, 발전, 그리고 중요성을 탐구해야 한다.
정치경제학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론적 결론은 19세기 중반의 가장 발전된 사상들을 종합한 결과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에 담긴 혁명적 정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대담한 비전, 그리고 특히 영국의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인물들을 비롯한 ‘고전’ 경제학자들의 과학적 접근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독자적인 학문으로 발전했다. 당시에는 이를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렀다.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이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법칙을 발견하고 자연계의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경제학자들 또한 연구와 조사를 통해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과 내재된 역동성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애덤 스미스(1723-1790)는 계몽주의 시대의 인물로, 당대 계몽주의 전통의 정점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18세기, 자본주의 사회가 산업혁명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던 시기에 정치경제학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스미스가 이전 학자들보다 더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변화하는 환경 덕분이었다. 특히,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그는 일관되고 포괄적인 ‘정치경제 체계’를 최초로 정립했으며, 이는 마땅히 인정받아야 할 부분이다.
스미스가 이 글을 쓸 무렵에는 자본주의가 이미 성장하고 성숙해 있었다. 영국에서는 산업과 도시가 농업과 시골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공장과 기계가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노동계급의 규모 또한 빠르게 확대되었다. 한편, 식민제국들의 확장과 국제 무역은 세계 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즉, 자본주의의 발빠른 성장은 경제에서 작용하는 본질적인 힘, 경향 및 관계들을 더욱 선명하고 대조적이게 드러냈으며,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압력과 과정들을 보여주었다.
학파
이것이 바로 스미스가 이전의 누구보다도 이루고자 했던 목표였으며, 고전경제학의 시발점이였다.
특히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경제학자들을 괴롭혀 온 질문 중 하나인 ‘부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무엇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점에서 애덤 스미스 이전 경제학자들의 사상은 당시 시대상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한계 또한 그러했다.
예를 들어, 1600년대의 ‘중상주의자’들은 산업자본이 아닌 상업자본이 지배하는 초기 자본주의 경제를 관찰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부는 주로 무역과 상업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관점에서 국부는 상품 수출, 금과 은 축적, 그리고 이를 국내 제조업에 투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바로 오늘날 ‘중상주의’라는 용어가 무역수지 개선을 위한 노력과 관세, 수입 쿼터와 같은 보호주의적 경제 정책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18세기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은 농업이 지배적인 시대와 장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제조업과 산업은 여전히 비주류였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토지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은 농촌에서 빼돌려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 – 역자)의 궁궐들과 부유층의 호주머니로 흘러들어갔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수아 케네(1694-1774)를 비롯한 중농주의자들은 토지와 농업 생산이 모든 부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귀족뿐 아니라 도시의 제조업자와 장인들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비생산적이고 기생적인 존재, 즉 농민의 노동에 의존하는 존재로 여긴 것이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그의 저서 『국부론』을 출간했던 1776년 당시 정치경제학의 대략적안 입장이였다 .
노동 분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스미스의 대표작은 자본주의 국가와 그 국민들, 특히 부르주아지를 부유하게 만든 요인들을 탐구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대다수 백성의 수입원이 무엇이었는지, 또는 여러 시대와 국가에서 그들의 연간 소비를 충당해 온 자금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스미스가 스스로 세운 목표였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러한 맥락 속 분업의 개념, 즉 전문화와 협력의 결합이 노동력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어떻게 향상시키는지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그는 핀 공장이라는 잘 알려진 예를 통해 이 아이디어를 설명한다.
스미스는 『국부론』 1장에서 “한 사람이 철사를 뽑아내고, 다른 사람이 곧게 펴고, 세 번째 사람이 자르고, 네 번째 사람이 뾰족하게 만들고, 다섯 번째 사람이 끝을 갈아서 머리 부분을 끼울 수 있도록 한다.”라고 설명했고, 그 결과는 ‘노동 생산력의 극적인 향상’이라고 설명했다.
작업장 내에서 각 작업자가 한 가지 전문화된 작업을 수행하는 이러한 분업은 더 적은 노동력으로 더 많은 생산량을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핀 공장을 포함한 다른 어떤 사업체의 소유주라도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시장 점유율을 높여 이윤을 증대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스미스는 개별 공장에 적용되는 원칙이 사회 전체에도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기업이 업무를 분담하고, 숙련된 전문가를 양성하고, 생산을 조정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것처럼, 국가경제도 산업간 생산 분업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켜 더욱 부유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점은 스미스가 중상주의와 보호무역주의에 반대하며 자유무역을 지지하게 된 배경이 되었으며, 이후 리카도의 ‘비교우위’ 이론과 같은 자유주의적 개념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제로섬 게임의 일환으로 경제적 자급자족을 추구하기보다는, 모든 국가가 전문화하여 자유롭게 무역할 때 사회 전체가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자유무역 정책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국가는 바로 경제적으로 가장 생산적이고 경쟁력 있는 자본주의 강대국이자 스미스와 리카도의 모국인 영국이었다는 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경제적 자유화로부터 가장 큰 이득을 본 집단은 영국 산업가들이였다.
생산력
스미스는 자신의 저서 제목에 담긴 질문에 답하며, 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의 생산력’이지, 상인의 무역이나 귀금속의 산더미, 혹은 자연이 물려준 풍요로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생산력은 과학과 전문화를 통해, 기술과 기법을 통해, 그리고 생산의 중앙집중화와 조정을 통해 증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미스는 교회와 귀족, 그리고 상비군과 국가 행정관들은 비생산적이며 경제에 부담을 주는 존재, 즉 산업활동에서 생산된 부의 일부를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스미스는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계층의 노동도 하층민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가치도 생산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군주와 그 휘하의 모든 사법 및 전쟁 관료들, 그리고 육군과 해군은 모두 비생산적인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국민의 하인이며, 다른 사람들의 연간 노동 생산물의 일부로 생계를 유지한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잉여가치론』에서 “이것은 아직 사회 전체, 국가 등을 자신에게 복종시키지 못한, 여전히 혁명적인 부르주아지의 언어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국가, 교회 등은 오로지 (스미스에 따르면) 생산 부르주아지의 공동 이익을 감독하거나 관리하는 위원회인 한에서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 비용은 불가피한 최소한으로 축소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점에서 스미스와 그의 사상은 분명한 시대적 산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유주의적인 자본가 계급을 위한 이론적 선구자였으며, 당시 부상하던 산업 부르주아지의 옹호자로서 구체제의 잔재에 일격을 가했다.
노동가치론
스미스와 고전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상품의 생산과 교환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정확하게 파악했다. 여기서 상품과 서비스는 개인적인 소비나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교환, 즉 거래를 위해 생산다.
마르크스가 그의 저서 『자본론』(Das Kapital) 의 첫 문장에서 설명했듯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적인 사회의 부는 막대한 상품 축적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스미스나 그의 동시대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와 그의 자유주의 동료들은 당시의 ‘상업 사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명칭은 달랐을지 몰라도,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바로 시장과 상품 거래에 기반한 경제였다. 그리고 스미스와 고전 경제학자들(그리고 후기의 마르크스)이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상품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힘이었다.
질문은 간단해 보였다. 왜 어떤 상품은 다른 상품보다 더 가치가 있고 더 비싼가?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상품들이 교환되는 상대적인 비율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러 세대에 걸쳐 경제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앞서 논의했듯이, 기존 경제학파들은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 활동의 특정 형태 와 노동 유형을 규정해 왔다. 상인의 무역 활동이나 농민의 노동 등이 그러한 예이다.
하지만 스미스 연구의 가장 획기적인 발견은 노동 전반이 사회의 부의 원천이라는 점을 밝혀낸 것이었다 .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애덤 스미스가 부를 창출하는 활동에 대한 모든 제약을 거부한 것은 엄청난 진전이었다.”라고 논평했으며, “그에게 있어 그것은 제조업, 상업, 농업 노동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였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이해는 정치경제학에서 중요한 발전인 노동가치론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스미스는 심오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특정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품은 그 생산에 필요한 시간에 비례하여 교환된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 중 “상품의 실질 가격과 명목 가격”을 논하는 장에서 “언제 어디서든 얻기 어렵거나 얻는 데 많은 노동력이 드는 것은 비싸고, 쉽게 얻거나 아주 적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싸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노동만이 모든 상품의 가치를 언제 어디서나 평가하고 비교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 진정한 기준이고, 노동이야말로 상품의 진정한 가격이며, 돈은 단지 명목상의 가격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같은 장의 뒷부분에서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은… 유일하고 보편적이며 정확한 가치 척도이자,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서로 다른 상품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다.”
애덤 스미스가 노동가치론을 창안한 것은 아니다. 노동가치론의 초기 형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등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스미스가 이 개념을 그토록 명확하게 주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론적 틀을 구축한 최초의 인물인것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없다.
마르크스는 『국부론』 의 저자가 정치경제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며 축하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게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은 잊거나 덮어두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이다. 앞서 언급한 『이코노미스트』의 인용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부르주아 구속복
스미스의 노동가치론, 그리고 정치경제학 전반에 대한 생각은 완성된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은 경제 사상에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으며, 더 나아가 심도 있는 연구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후대의 고전 경제학자들 중에서는 영국의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가 스미스의 이론을 가장 발전시켰는데, 그는 부르주아 사상의 한계 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이론을 확장했다.
리카도는 경제 문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방식, 특히 노동가치론의 적용에 있어 스미스보다 더 철저하고 일관성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그는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리카도는 노동 시간에 의한 교환 가치 결정 법칙을 가장 명확하게 공식화하고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고전 정치경제학에 최종적인 형태를 부여했다.”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결국 리카도는 자신의 부르주아적 관점이 현실과 점점 더 충돌하면서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스미스 시대 이후 자본주의는 더욱 확장되고 발전했으며, 주기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기 시작했다.
리카도는 스미스와 그 이후의 다른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위기가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이러한 위기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내재된 것이나 가치와 이윤의 법칙에 암묵적으로 내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자였던 그들에게 있어 시장은 완전무결 그 자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발전시킨 것은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몫이었다. 그는 스미스, 리카도, 그리고 다른 고전 경제학자들의 사상과 가정(假定)들을 계승하고, 거기에서 도출되는 논리적 결론과 모순을 밝혀내어, 정치경제학을 부르주아적 틀에서 해방시켰다.
이윤의 수수께끼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과 강력한 철학적 방법론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움직임과 운동을 지배하는 근본 법칙들을 밝히고 설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고전 경제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던 난제, 즉 이윤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었다.
스미스와 고전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즉 ‘상업 사회’를 상품 교환에 기반한 사회로 보았으며, 더 나아가 개인 간의 공정하고 평등한 교환에 기반한 사회로 보았지, 속임수, 강도짓, 약탈에 기반한 사회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러한 공평한 교환 속에서 불평등이 생겨났다. 특히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교환에서 자본가는 처음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에서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얻는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매듭으로 얽힌
스미스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보인 혼란은 고전학파를 곤경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노동가치론을 제시했지만, 그 방식은 조잡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스미스는 때때로 상품의 가치가 그 생산에 투자된 노동 시간에서 비롯된다고 명확히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상품의 가치가 “그 상품의 소유자가 구매하거나 동원할 수 있게 해주는 노동의 양과 같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표현은 동일하지 않다. 첫 번째에서는 교환가치가 특정 재화를 생산하는 데 투입된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고, 두 번째는 마르크스가 말했듯 ‘이 재화와 교환하여 구매할 수 있는 살아있는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전자는 노동가치론에 대한 대략적으로 정확하지만, 기초적인 설명이다. 반면 후자는 상품의 가치가 그것과 교환될 수 있는 ‘노동’의 가치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 말해, 상품의 교환가치가 임금으로 측정된다는 것, 즉 그 상품이 ‘지시’하고 동원할 수 있는 ‘노동’의 가격으로 측정된다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가치에 대한 이 두 번째 정의는 순환 논리로 이어진다. 상품의 가치는 그것과 교환될 수 있는 ‘노동’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파는, 그 자체로 상품인 이 ‘노동’의 가치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마르크스는 “여기서 가치가 측정의 척도이자 가치 설명의 근거가 되므로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가치에 대한 이 두 가지 정의는 각각 스미스가 그 문제를 고찰했던 서로 다른 관점에 해당한다.
첫 번째는 개별 상품 생산자의 관점으로, 자신이 상품 생산에 투자한 노동 시간에 따라 상품의 가치를 산정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자본가의 관점으로, 상품 생산을 위해 지불한 임금 비용을 기준으로 상품의 가치(또는 가격)를 판단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개별 생산자들이 서로 교환하는 경우에는 동등한 교환, 즉 동일한 노동 시간을 포함하는 상품의 교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본가와 그들의 피고용인, 즉 임금 노동자의 경우를 살펴보면,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상품에 담긴 가치가 자본가가 임금으로 지급하는 가치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장이나 사업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지불한 임금보다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스미스는 자본가들의 이윤이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예를 들어, 그는 『국부론』에서 “노동자들이 창출하는 가치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그들의 임금이고 다른 하나는 고용주의 이윤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스미스는 노동가치론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이러한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 또한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노동과 노동력
마르크스의 혁명적인 이론적 도약은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를 설명한 데 있었다. 바로 거기에 이윤을 이해하는 비밀이 있었고, 나아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든 불가사의를 풀어내는 열쇠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겉보기에 역설적인 이 현상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바로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것은 ‘노동’이 아닌 노동력, 즉 노동의 산출물이 아니라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판다고 설명함으로써였다.
이러한 노동력이란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여기에는 노동자와 그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식량, 주거, 의복, 의료, 교육 등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도 포함된다.
즉, 임금은 이러한 노동력의 가격이며,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상품의 화폐적 표현인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대가로 노동력이 정해진 시간(한 달, 하루, 심지어 한 시간) 동안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구매한다. 그리고 그 노동 기간 동안 생산된 모든 가치를 자본가가 차지하게 된다.
자본가들의 이윤은 오늘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임금으로 살 수 있는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달리 말하자면, 노동자들 노동력의 사용가치, 즉, 자본가들이 임금을 지급하는 시간 동안 생산한 생산물이 노동력의 교환가치보다 크다는 것이다.
착취와 계급투쟁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임금노동과 자본』 서문에서 “최고의 경제학자들이 노동의 가치에서 출발할 때 걸렸던 덫은 노동력의 가치를 출발점으로 삼는 순간 사라진다.”라고 설명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은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이지만, 동시에 매우 특수한 상품이다. 노동력은 가치를 창출하는 힘, 즉 가치의 원천이며, 더 나아가 제대로 활용될 경우 스스로 지닌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원천이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을 일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들이 받는 임금에 상응하는 가치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는, 이를테면, 단지 4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이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 즉 하루 종일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구매한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임금을 벌어들인 후 4시간 만에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일이 끝날 때까지 8시간 내내 계속 일한다.
그러므로 남은 네 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사실상 자본가를 위해 무보수로 일하는 셈이다. 이 시간 동안 그들이 수행하는 모든 노동은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필요 노동을 넘어서는 잉여 노동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시간에 창출하는 모든 가치는 잉여가치이며, 자본가, 지주, 은행가들이 이윤, 임대료, 이자를 추출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사장들의 이윤은 노동력 착취, 즉 노동계급의 무급 노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다시, 노동자들이 생산했지만 자본가들이 독점하는 이 잉여가치를 둘러싼 작업장 내부와 사회 전반에서의 계급투쟁을 야기한다.
스미스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경제 속에서 모두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가치론을 철저히 이해하면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근로조건을 추구하는 욕구, 즉 노동계급의 물질적 이익은 자본가의 욕구, 즉 더 큰 이윤을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라는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혼란과 모순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사상의 핵심에 있는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여러 이론적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가치 문제에 대한 그들의 혼란이 ‘고전학파 정치경제학의 주요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스미스는 노동가치론이 단순 상품 생산이 지배적이었던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즉 사회가 자본가와 노동자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물물교환을 통해 서로 직접 재화를 교환하는 개별 생산자로 구성되었던 이상화된 상상의 시대에만 적용된다고 본 것이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가치의 법칙은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고, 상품 생산과 교환이 보편화되고, 신용 시스템과 세계 시장이 형성되고 성숙해진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온전히 발휘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미스는 자본과 임금 노동이 생겨나고 개별 생산자들이 더 이상 직접 대면하지 않는 산업 시대에는 노동가치론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고 믿었다.
대신 그는 상품의 교환 가치는 이제 노동, 자본, 토지라는 세 가지 주요 생산 요소에 대한 대가로 필요한 임금, 이윤, 임대료를 합산하여 산출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경쟁은 결과적으로 시장 가격을 이러한 가치, 즉 스미스가 설명한 상품의 ‘자연 가격’으로 밀어붙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임금, 이윤, 지대와 같은 것들은 상품 가격을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생산 비용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그것들은 노동자, 자본가, 지주가 각각 얻는 소득이자 수익이며, 노동계급이 생산 과정에서 창출한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스미스는 개념을 뒤집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스미스는 교환가치를 임금, 이윤, 지대 등으로 분해하는 대신, 이것들이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임금, 이윤, 지대는 가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원천 자체가 된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설명’이다. 만약 상품 가격이 임금, 이윤, 그리고 임대료의 합으로 결정된다면, 교환가치의 이러한 독립적인 구성 요소들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이런 논리대로라면 결국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
경제를 파이에 비유해보자. 스미스가 사실상 주장했던 것처럼 여러 조각을 합쳐서 파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파이를 굽고,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각 계층은 생산을 통해 창출된 가치, 즉 상품에 담긴 가치가 없다면 소비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필요와 우연
가치에 대해 대립하는 의견들은 결국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은 비록 원시적인 면이 있지만, 상품 생산과 교환을 지배하는 법칙을 밝히려는 시도였다.
반면 그의 ‘임금, 이윤, 임대료’ 모델은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 사물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는데, 이 자본가는 생산 비용을 합산하고 예상 수익률을 더하여 자신이 생산하는 상품에 대해 얼마만큼의 가격을 책정해야 하는지 계산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강조했듯 스미스의 결함은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사회적 관계, 즉 가치법칙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자본가에게 경쟁과 가격이라는 관점에서 사물이 자본가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주관적이고 피상적이며 우연적인 것에 대한 집착 사이를 오갔다는 데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접근 방식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스미스가 먼저 문제를 그 내부적 관계 속에서 파악한 다음, 그 반대 관점의 경쟁 구도 속에서 문제를 파악한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후자의 개념은 특정한 함의들을 지닌다. 이는 상품 가격이 주관적이며, 관련된 다양한 경제 주체들의 변덕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자본가들이 더 높은 이윤을 요구하면 가격은 상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데, 부르주아 계층은 노동자들이 더 나은 임금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이른바 ‘임금-물가 악순환’을 초래한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일부 좌파 인사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기업주들이 폭리와 가격 조작을 통해 ‘그리드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주장들의 정치적 결론은 반동적이고 이상주의적이다. 즉, 노동자들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실질 임금 삭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거나, 단순히 사장들이 ‘탐욕스럽지 않도록’ 설득하는 것만으로 물가 상승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격과 가치
마르크스는 이와 관련하여 스미스의 혼란이 가치와 가격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발전시켰다.
앞서 논의했듯이 고전 경제학자들에게 노동가치론은 단순한 원시적 개인 생산자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었다. 그들은 무인도에서 생존 수단을 생산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자신이 생산하거나 조달하는 데 투입한 노동 시간과 비교하여 생산물의 가치를 정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만약 나무 뗏목을 만드는 데 네 시간이 걸리고, 코코넛 100개를 모으는 데에도 네 시간이 걸린다면, 크루소에게 뗏목의 가치는 코코넛 100개와 같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비슷한 예를 들며 “만약 사냥꾼들이 많은 나라에서 비버를 잡는 데 드는 노동력이 사슴을 잡는 데 드는 노동력의 두 배라면, 비버 한 마리는 당연히 사슴 두 마리와 맞먹거나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고립된 생산자와 물물교환의 체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는 사회화된 생산 체계이며, 교환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가격을 흥정할 수 없다. 소비자는 시장 가격에 직면하게 되며, 공급자는 경쟁자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치는 주관적으로 측정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관계이다. 마르크스가 설명했듯, 가치는 어떤 것을 생산하는 데 투입된 특수하거나 개별적인 노동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기초한다. 즉 사회의 현재 기술 수준을 고려하여 특정 상품을 대량 생산하는 데 필요한 평균 시간에 기반하는 것이다.
한편, 경쟁의 힘은 상품 가격을 그 가치로 이끌어간다. 수요와 공급은 시장 가격의 변동을 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격이 진동하는 축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상품의 가치, 즉 교환을 통해 확립되고 결정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에 상응하는 것이다.
임금과 이윤은 주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물질적 소득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노동계급이 생산을 통해 창출한 가치를 둘러싼 살아있는 힘들간의 투쟁인 계급 투쟁에 의해 결정된다.
‘보이지 않는 손’
이로써 우리는 다시 노동 분업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스미스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공장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서도 분업은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핀 제조업자의 사례와 경제 전반에 대한 이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특히 각각의 걍우에서 노동 분업이 어떻게 제어되는지에 대해서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자본주의적 기업의 틀 안에서, 일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사장의 지시에 따라 배분된다. 소유주나 경영자는 정해진 계획에 따라 누가 무엇을 할지 결정한다.
그러나 스미스는 사회적 차원에서는 경제를 의식적으로 조종하려는 움직임이 없다고 지적했다.
대신, 자본과 노동을 포함한 사회 생산력의 분배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즉 수요와 공급의 힘에 맡겨지며, 가격 신호(가격과 가치의 사이의 괴리)와 이윤 추구가 투자를 맹목적이고 무질서한 방향으로 이끈다고 했다. 스미스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무형의 힘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스미스는 자본가가 “공익을 증진시키려는 의도도 없고, 얼마나 증진시키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는 오직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하며, 생산물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산업을 운영함으로써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려 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스미스는 “자본가, 즉 투자자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진정으로 사회를 위해 노력할 때보다 오히려 사회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다. 공익을 위해 거래하는 척하는 사람들이 큰 선행을 베푼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라고 결론지었다.
다시 말해, 경쟁 시장과 자기 이익 추구, 즉 더 큰 이윤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최적의 효율적인 경제적 ‘균형’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균형은 사회의 자원과 생산 능력을 활용하여 가능한 최대의 부를 창출하고 모두에게 번영을 가져다준다.
“우리가 저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가게 주인의 자비로움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이해관계로부터 온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애가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가치의 법칙
스미스가 여기서 무의식적으로 묘사하고 있던 것은 가치의 법칙, 즉 상품의 이동을 지배하고 비효율을 제거하고 생산성을 높이며 경제 전반에 걸쳐 자원을 규제하고 분배하는 객관적인 압력이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의 『 자본론』서문에서 “임금, 가격, 토지, 지대, 이윤, 이자, 신용, 증권 시장 등 자본주의 경제의 여러 영역을 지배하는 법칙들은 무수히 많고 복잡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마르크스가 발견하고 끝까지 탐구한 단 하나의 법칙, 즉 노동가치의 법칙으로 귀결되며,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적인 규율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가격과 가치의 차이와 같은 개념을 포함하여 노동가치론에 대한 명확하고 철저한 이해 없이는 스미스의 설명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이고 반쯤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으며, 그는 개인의 이기심과 ‘보이지 않는 손’을 강조한다.
더욱이, 변증법적 접근 방식이 없었다면 스미스와 고전 경제학자들은 효율성과 균형을 확립하는 바로 그 시장 원리가 필연적으로 그 반대인 파괴적이고 낭비적이며 혼란스러운 위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가치 법칙에서 비롯된 자본주의의 모순은 자기 이익, 즉 이윤 추구라는 합리적인 행위가 사회 전체에는 극도로 비합리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스미스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고, 그의 현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 vs 피상적 분석
마르크스가 설명했듯이, 스미스의 가장 큰 한계는 바로 그의 모순성, 즉 서로 모순되는 접근 방식과 사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경향에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는 가치와 노동가치, 즉 자본주의의 작동법칙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가격과 경쟁, 다시 말해 ‘상업 사회’의 우연적인 특징에만 몰두한다.
그는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이해하다가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는 어떤 부분에서는 잉여 가치가 노동 계급의 무급 노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는 이윤 수준이 자본가들의 변덕에 따라 결정되는 무작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현실적인 경제 문제를 다루고, 부를 창출하는 데 있어 노동과 생산의 핵심적인 역할을 규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접근 방식은 관념론적 경향을 띠는데, 자본주의의 범주와 법칙을 ‘자연적’이고 영원불변한 것으로 제시한다.
때로는 그의 방법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인 관계와 상호 연결성을 밝히려고 시도하지만, 때로는 경제 현상의 표면적인 모습에 현혹되어 문제를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스미스의 경우,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서로 나란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서로 뒤섞이고 끊임없이 모순된다.”라고 요약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애덤 스미스가 엄청난 순진함으로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움직인다고 말했으며, 이러한 모순은 오직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만이 해결할 수 있었다.
저속한 경제학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리카도는 과학적 접근 방식과 노동가치론을 보다 일관성 있게 적용하여 스미스의 사상에 내재된 몇 가지 모순을 극복했다.
허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리카도의 시대에 정점을 찍었다.
스미스와 리카도의 뒤를 이어 마르크스는 그들의 경제 사상이 갖는 논리적 결론, 즉 노동가치론과 가치의 법칙에서 비롯되는 상업적 위기로 향하는 자본주의의 내재된 경향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노동계급의 성장과 혁명적 계급투쟁의 위협은 부르주아지와 그 대표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후반에 이것이 ‘과학적 부르주아 경제학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는 이 정리나 저 정리가 참인지 거짓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에 유익한지 해로운지, 유리한지 불리한지가 문제가 되었다… 공정한 탐구자 대신 돈을 받고 여론을 조작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과학적 연구 대신 양심의 가책과 악의를 가진 변명론자들이 등장했다.”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관념론, 주관주의, 그리고 독단주의로 후퇴했다. 고전학파가 그랬던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부르주아지의 꼭두각시이자 용병이 되어 시장경제 옹호와 반마르크스주의 선전을 쏟아내는 광신도들이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장 바티스트 세이, 토머스 맬서스 등을 비롯한 이러한 경제학자들을 ‘저속한 경제학자들’이라고 묘사했다.
마르크스는 고전학파의 가장 훌륭한 사상과 방법론을 바탕으로 삼았지만, 저속한 경제학자들은 이를 버렸다.
오히려 그들은 스미스와 고전주의자들의 가장 퇴보적이고 관념론적인 측면들을 받아들였다. 즉 경쟁, 가격, 현상의 피상적이고 우연적인 측면에 대한 집중, 경제학에 대한 비역사적인 접근 방식, 그리고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가 출발점으로 삼은 고독하고 고립된 사냥꾼이나 어부’라는 공허한 추상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저속한 경제학자들이 스미스의 저술을 일방적이고 환원주의적으로 해석하면서, 그의 경제 사상의 또 다른 중요하고 본질적인 측면, 즉 노동가치론은 편리하게 무시되고 적극적으로 거부당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스미스를 사유재산, 경쟁, 그리고 무자비한 이윤 추구라는 반동적인 신조의 사도로 여기고 있다. 한편,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은 마치 복음처럼 받아들여지며, 자본주의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들과 신봉자들에게 종교적 신념을 시험하는 척도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부르주아 경제학은 수렁에 빠져 있으며, '한계효용론'과 같은 완전히 주관적인 가치관과 하이에크의 오스트리아 학파가 이제는 대학 강의계획서와 교과서에서 경제사상의 최종적인 견해이자 애덤 스미스의 진정한 후계자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스미스가 오늘날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퍼뜨리는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볼 수만 있었다면 그는 무덤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동가치론이 없다면 이러한 자유시장 광신자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며, 자본주의가 왜 주기적으로 위기에 빠지는지,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며
마르크스는 『자본론』 3권에서 가치 법칙이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조절자이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경제적 역동성과 경향을 야기하는 원동력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가치론은 이윤이 어디에서 오는지, 자본과 노동이 경제 전반에 어떻게 분배되는지, 인플레이션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지, 왜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더 오래, 더 고되게 일하도록 몰아붙이는지, 왜 자본가들이 기술과 기계에 투자하는지, 왜 착취와 불평등이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는지, 그리고 왜 이 체제가 근본적으로 과잉생산의 위기와 같은 경제적 위기에 취약한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왜 보수(補修)나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전복되어야만 하는지, 왜 가치법칙, 사적 소유, 시장의 법칙은 의식적인 사회주의적 계획, 공동 소유, 노동자들의 민주적 통제에 기반한, 이윤 추구가 아닌 필요를 위한 생산이라는 새로운 경제 법칙으로 대체되어야 하는지를 입증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부론』 출간 250주년을 맞아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과학적 사회주의가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애덤 스미스와 고전학파의 가장 훌륭한 이론적 공헌을 옹호한다.
우리는 오늘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모든 공격과 왜곡으로부터 노동가치론을 옹호하고, 자본주의가 여전히 진보적이며 인류를 해방시키는 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한다. 마르크스주의만이 자본주의 체제의 실체를 밝히고, 시장의 신비주의를 벗겨내며, 노동계급을 위한 혁명적 길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레온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고전 정치경제학, 즉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이론은 자본주의가 늙어가며 내일을 두려워하기 전에 절정에 달했다. 마르크스는 이 두 위대한 고전 경제학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완벽한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고전 경제학의 근본적인 오류는 자본주의를 사회 발전의 한 역사적 단계로 보는 대신, 인류가 영원히 겪을 존재 방식으로 간주한 데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오류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폭로하고,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붕괴를 입증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매우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고전 경제학의 산물이며, 그 아이를 낳기 위해 어머니는 목숨을 내놓았다.”
“과학은 학자의 고립된 연구실에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 속에서 그 가치를 발견한다. 사회를 분열시키는 모든 이해관계와 열정은 과학, 특히 부와 빈곤을 다루는 정치경제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자본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부르주아지의 이론가들로 하여금 착취 체제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외면하고, 경제적 사실에 대한 단순한 서술, 과거 경제 연구, 그리고 훨씬 더 심각하게는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노골적으로 왜곡하는 데 몰두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공식 교육기관에서 가르치고 부르주아 언론에서 설파하는 경제 이론은 중요한 사실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지만, 경제 과정 전체를 포괄하고 그 법칙과 전망을 발견하는 데는 전혀 능력이 없으며, 그렇게 하려는 의지조차 없다.”
“공식적인 정치경제학은 죽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오직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